할머니 생신을 기념해서 친척 모임으로 놀부부대찌개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나는 절망했다. 망할, 옆에 콩불도 있고 명동칼국수도 있는데 왜 부대찌개야, 부대찌개인지 짬통찌개인지 알 바가 아니었고, 부대찌개 이름은 왜 또 놀부인지 알기도 싫었고, 그저 부랄처럼 덜렁이는 놀부의 혹을 양손으로 잡고 때버리고 싶었을 뿐이었다.1 하지만 나도 벌써 어엿한 중학생, 중학생으로서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어딜 가든 개의치 않은 척했다. 그리고 입성한 놀부부대찌개. 큼지막한 전골냄비에 놀부부대찌개가가 나오고, 어거지로 한입. 나는 이제부터 놀부의 금전적 갈취, 정서적 착취, 물리적 폭력 등의 갖은 폭압에도 여부없이 순응하기로 한다. 한마디로 내 입맛에 딱이었다. 수제비가 제일 맛있는 줄로만 알았던 정현이의 세계가 무너졌고, 그날부로 부대찌개는 정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나는 부대찌개가 맛있는 줄 알았다. 그냥 아무렇게나 들어간 첫 부대찌개 집이 이리도 맛나니, 잘 찾아보면 더 맛난 부대찌개도 있겠거니 했다. 콜럼버스 외딴치는 개척 정신으로 부대찌개 음식점을 탐사했다. 땅스부대찌개, 킹콩부대찌개, 이태리부대찌개, 원조부대찌개, 칠리부대찌개, 해방촌부대찌개, 송탄부대찌개, 임꺽정부대찌개 등등 내로라하는 부대찌개집은 다 가보았으나 놀부부대찌개를 능가하는 부대찌개는 찾을 수 없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는지, 부대찌개가 맛있는 게 아니라 처음 들어갔던 놀부부대찌개가 맛있는 것이었다.
부대찌개 개척 정신이 자못 시들해졌을 무렵, 나는 부대찌개의 원조집, 오뎅식당을 알게 됐다. 허기숙 할머니가 오뎅집으로 시작한 분식집이, 미군 관계자로부터 햄, 소시지, 베이컨을 받아 부대볶음을 개발했고, 밥에 어울리는 국물요리의 수요를 반영해 부대찌개를 창시하게 된다. 경기도 의정부시 호국로1309번길 7, 이곳이 바로 부대찌개의 발상지이자 부찌인(부대찌개인)의 메카, 성지였던 것이다. 이주승과 서동희와 나2는 자랑스러운 부찌인으로서 오뎅식당 순례라는 엄숙한 사명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우리는 조속히 순례길을 물색했고, 자전거로 보라매공원에서 시작해 도림천, 안양천을 타고 한강에 합류, 한강을 따라 이동하다가 성수대교를 건너 중랑천을 타고 의정부에 도착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물론 지하철을 타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성지에 입성하는 것은 부찌신에 대한 예우에 대단히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했다.
당시 나에게는 람보르기니3와 풍만이4가 있었다. 이주승에게는 철티비5가 있었다. 나는 람보르기니를, 이주승이 풍만이를, 서동희는 철티비를 타기로 했다. 그렇게 아침에 보라매공원에 집결한 삼인방. 하하호호 싱글벙글 페달을 밟으며 대장정의 막을 올린다. 그들의 앞날을 모른 채…
서로의 얼굴만 봐도 재미있는 중학생. 우리는 환담을 나누며 전진했다. 병렬 배치로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뒤에서 사람이 오면 직렬 배치로 전환해 비켜주고, 뒷사람이 지나가면 다시 병렬 배치로 복귀했다. 오뎅식당에 도착하면 무슨 소원을 빌 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얼마나 맛있을까 즐거운 상상에 웃음꽃을 피웠다. 무료해질 즈음 레이스도 하고, 앞바퀴를 드는 기술인 윌리도 연습했다. 왁자그르르 떠들며 가다 보니 얼마 되지 않아 한강에 도착했다. 한강변 편의점이 우리를 반겼지만 우리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는 식음을 전폐하고 성지순례에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허기를 극한의 경지로 몰아 오뎅식당 부대찌개의 감동을 극대화하려는 얄팍한 전략이 아니라, 성지에 표하는 우리의 결연한 진정성이었다. 하늘도 맑고 기온도 적당하고 바람도 별로 없었다. 순풍도 돛 단 듯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과연 부찌신이 우리를 돕는구나 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총 거리에 반도 못 미치는 지점임에도, 우리는 성수대교를 주요 분기점으로 보고 그곳만 건너면 게임 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성수대교를 건너자마자 평지풍파가 일어났다. 갑자기 역풍이 불어 자전거가 앞으로 잘 나가지 않았고, 지금까지 너무 신나게 떠든 바람에 생각보다 많이 체력을 고갈됐다. 무엇보다 철티비로 인해 우리의 전립선이 많이 손상되었다. 철티비는 차체가 무겁고 바람에 영향을 많이 받아 체력 소모가 심했다. 그래서 우리 셋은 자전거를 번갈아 가면서 탔다. 하지만 체력 소모보다 더 큰 문제는 안장이었다. 얌전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야금야금 우리의 전립선을 파괴해 왔던 것이다. 철티비를 타면, 일정 시간 후 전립선이 저릿하기 시작하고, 그 감각이 몸 전체로 퍼져나가 사지가 마비됐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의식의 끈이 놓아지기 직전, 풍만이 위에 앉아 절명의 위기를 넘겼다. 풍만이 위에 앉으면 굳어버린 몸이 봄눈 슬듯 녹고 전립선의 따뜻한 감각이 돌아왔다. 그렇게 우리는 철티비로 전립선을 파괴하고, 풍만이로 회복하기를 반복하며 성지에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졌다.
해가 지고, 온도가 점점 내려갔다. ‘위도가 높아질수록 기온이 낮아진다’를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느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단순히 해가 지면서 변하는 온도가 아니라, 확실히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온도가 낮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편의점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굶주림을 애써 외면하며 차갑고 매서운 역풍을 뚫고 우리는 나아갔다. 언젠가부터는 대화가 사치가 됐다. 더 이상 농담도, 웃음도 없이 그저 묵묵히… 풍만이의 전립선 회복력도 점점 낮아졌고, 너무 지친 나머지 철티비를 타는 사람은 일행이 안 보일 정도로 뒤처졌다. 포기라는 단어가 연발 튀어나왔다. 특히 초기에 철티비를 타 온 서동희의 절망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우리는 성지순례의 기치를 내걸고 끝까지 페달을 밟았다. 분명 무모한 도전이었다. 밥도 안 먹고 버티는 55km의 대장정. 하지만 중삐리의 치기로 치부하기에는, 부대찌개를 향한 그들의 경건한 신념이 퇴색될까 염려스럽다.
다행히도 우리는 목숨을 부지한 채 우리는 의정부에 당도했다. 기대감이 고조되었고, 사진으로만 접하던 오뎅식장의 간판을 마주하자 우리는 그 자리에서 무릎이 꿇렸다. 과연 부대찌개 원조집 오뎅식당이구나, 대기 줄이 징그럽게 길었다. 하지만 10시간을 페달질한 우리에게는 그 정도는 가소로웠다. 자전거를 세우고 줄 뒤에 섰다. 페달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도 잠시, 가만히 서 있으니 너무 추웠다. 반팔 반바지 차림이었기에 추위는 일층 더 파괴적이었다. 수족냉증이 있는 나로서는 더 치명적이었다. 동상의 위협에 우왕좌왕하던 그때, 오뎅식당 건너편 부대찌개 집 앞에 서 계시는 이모님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머니는 어서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부대찌개 집은 손님이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인산인해의 오뎅식당과 극으로 상반되는, 독특한 광경이었다. 우리는 갈림길에 섰다. 앞집에 들어간다면 우리의 발가락은 건사하겠지만, 성지 입성의 염원은 물거품이 되고, 오뎅식당에 간다면 부찌신과 접신하겠지만 우리의 발가락은 잘려 나갈 것이다. 일생일대의 기로 앞에서 번뇌하던 중 하필 온풍기가 빵빵하게 틀어져 있는 자리가 우리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여 와~ 서비스 많이 줄게~” 악마가 속삭인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몸은 앞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이주승이 말했다. “발가락 까매도 살색 아크릴로 칠하면 ㄱㅊ” 나는 깊은 안도에 한숨을 내쉬며 악마의 유혹을 떨쳐낼 수 있었다.
드디어 우리 앞에는 한 팀 밖에 남지 않았다. ‘놀부부대찌개를 능가하는 부대찌개를 영접하게 되는 건가?’ 나는 나의 종교적 책무를 다했다는 충일감에 사로잡혀 호흡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어둠이 앞을 잠식할 무렵 갑자기 한 줄기의 빛이 내리비쳤다. 나는 기어코 방언을 터트렸다. ‘아아… 부찌신이시여.. 미천한 저를 구원하러 오신 겁니까? 아.. 심복하겠나이다…’ 눈을 떠보니 서동희가 자전거 후레쉬로 내 얼굴에 눈뽕하고 있었다. 좌우지간 60분이라는 장구한 기다림 끝에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나는 우선 양말을 벗어 동상 여부를 확인했다. 취두부를 방불케 하는 악취가 공간을 메우고, 주변 사람들이 눈이 따갑다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발가락은 살색이었다. 부대찌개 1호 집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회전율도 과연 1등이었다. 앉은 지 2분도 안 돼서 부대찌개 3인분이 나왔다. 햄과 라면사리, 파를 앞접시에 담았다 덜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왔다. 드디어 오뎅식당 부대찌개를 실은 숟가락이 내 입 안에 들어왔다. 우물우물.. 우리는 고개를 돌려 서로를 응시했다. 이윽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댕식당, 그닥 맛있지 않다는 것을. ‘정녕 이 거짓된 진실을 위해 우리가 이 고생을 해가며 이곳에 왔나?’ 지나온 국회의사당, 세빛둥둥섬, 중랑천 왜가리, 피골이 상접한 우리들의 배때지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탁자 위에는 눈물이 낭자했고, 우리는 오뎅식당을 벗어날 때까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부대찌개의 성지인 오뎅식당을 폄하하는 것은 부찌인으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터부, 신성 모독이다. 하지만 나는 오뎅식당 문을 밀고 나가며, 갈릴레오의 마음으로 외쳤다. “그래도 놀부부대찌개가 더 맛있다.”
그날의 사건으로 놀부부대찌개는 ‘진리’이고, 부대찌개적 가능성의 최대치이자, 삼전의 96층과 같은 절대 불변의 최고점이라는 인식이 뇌리에 깊게 자리 잡았다. 더 이상 신기루를 좇지 않으리. 나는 다짐했다.
12년이 흘렀다. 이주승이 문자를 보내왔다. ‘놀부부대찌개보다 맛있는 부대찌개를 찾았음’ 나는 생각했다. ‘올 것이 왔구나. 요 며칠 회사 일로 힘들어하더니, 결국 정신병이 도졌구나. 놀부부대찌개보다 더 맛있다니… 아주 단단히 미쳐버렸어.’ 많이 안쓰러웠다. 오뎅식당의 전횡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진리를 함께 좇아온 나의 전우, 기여코 갔구나. 코끝이 찡했다. 오뎅식당 이후 우리는 정신적인 충격에 몇 달간 구토와 졸도를 거듭했다. 우리는 12년간 그 트라우마와 싸워 왔고, 최근 직장스트레스로 정신력이 약해진 틈에 기어코 이주승의 의식을 붕괴시킨 모양이었다.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나는 얼른 정신병원을 알아봤다. 동네 정신건강의학과를 보내기에는 병세가 위중했기에 대학병원으로 예약했다. 하지만 이주승에게는 예약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미친 사람한테 미쳤다고 하면 더 날뛰는 법. 우선은 놀란 척, 기대에 부푼 척 문자를 보냈다. “맙소사 레츠끼릿”
그렇게 우리는 금요일 저녁에 만났다. 이주승은 이젠 놀부부대찌개는 쳐다도 안 본다고, 놀부 자식 혹 때버릴라고 스테인리스 의료용가위도 샀다고 으름장을 놓았다.1 과언이 아니었다. 메이드인 파키스탄이 음각된 의료용 가위의 서슬을 보니, 정말 일순간에 잘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주승은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야 한다며 나에게 경고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야이자식아 그 정도로 빌드업하면 놀부부대찌개도 맛없어.’
낭만부대찌개는 여느 맛집처럼, 먹자골목에도, 구불구불 골목 구석에도, 하물며 상가 1층에도 있지도 않았다. 코딩할 줄 알아야만 들어갈 수 있게 생긴, 유리로 뒤덮인 오피스 빌딩의 지하 1층에 있었다. ‘낭만 다 뒤졌네.’ 나는 생각했다. 매장 입구부터 손님을 맞고자 하는 의지가 의심되었다. 매장 앞에서 정리되지 않은 잡화가 잔뜩 어지럽혀져 있었고, 보다 보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식당에 입성하고 자리에 앉았다. 옆 테이블 부대찌개를 흘겨보았으나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꾸미지 않은 담백한 느낌의 플레이팅을 좋아하지만, ‘이건 좀 너무 안 꾸몄다, 좀 꾸미지’ 라고 생각할 정도로 투박한 비주얼이었다. 처음에 들어왔을 때 주모 머리 뒤로 어떤 빛 같은 게 났는데, ‘뭐 뒤통수에 랜턴 달 수도 있지‘ 라며, 그러려니 했다. 고등학교 동창인 김지성이 도착하고, 우선 부대찌개 3인분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주모가 주문을 재확인했다. 이상하게 주모의 목소리를 듣는데, 잠자기 졸음이 왔다. 이번 주 일을 열심히 했나 보군! 라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렇게 낭만부대찌개가 시험대에 올랐다. 이주승은 돌연 주머니에서 손등에 줄 3개가 새겨진 흰색 예장갑을 꺼냈고, 비장한 동작으로 손에 장착했다. 그리고 그는 앞접시에 낭만부대찌개를 나눴다. 나는 걱정했다. 맛있어하는 연기를 잘 할 수 있을까, 티가 나진 않을까 걱정이었다. 왜냐하면 이주승의 눈망울이 총명하게 반짝였고, 정신이 단단히 나가버린 상태라, 자칫 연기인 걸 들키면 어떤 행동을 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촉즉발의 순간, 마침내 낭만부대찌개가 김정현의 입속에 안착했ㄷ
눈앞이 하얘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방금까지 나와 함께 앉아 있던 이주승과 김지성이 사라지고, 옆 테이블도 사람들도, 왁자지껄한 말소리도, 냄새도, 짐작건데 시간도 사라졌다. 어떤 하얀 공간에 내가 있다.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왔는지, 주변 사람들과 사물들은 어디로 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굳이 알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의 습도, 온도, 빛, 소리, 중력 모든 것들이 완벽했다. 그냥 딱 지금 그대로가 좋았다. ‘더도 말고 더도 말고 지금만 같아라.. 딱 지금처럼만..’ 나는 되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구멍으로 무언가 넘어갔고, 서서히 사람들의 말소리가 페이드인했다. 앞에 이주승도, 옆에 김지성도, 주변 테이블 사람들도 모두 돌아왔다. 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내가 방금 어딜 다녀온 건지, 나는 죽은 건지, 산 건지, 살았던 건지, 나는 존재하는지, 존재했는지. 어안 벙벙해 입만 뻐끔뻐끔 열었다 닫을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길 잠시, 이주승이 말부리를 땄다.
“말했지?”
그렇다. 낭만부대찌개 한입으로 코페니우스쿠스 혁명에 버금가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거행되었다. 이 우주를 운행하는 기본 질서들이 재정렬되었고,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 근간이 흔들렸으며, 내 고간도 흔들렸다. 30년 인생을 살면서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나는 그 알 수 없는 공허함에 종종 가슴을 두드리기도, 남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얼굴도 모르는 연인을 그리워하는 모양새랄까? 만나지 못하더라도 얼굴만이라도 알고 싶은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세상이 어딘가 모르게 균열이 간 느낌이었다. 하지만 낭만부대찌개를 먹고 나니 모든 것이 이해됐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그 공허함도, 균열이 간 이 세상도, 아까 들어왔을 때 주모 뒤로 비치는 후광도, 들으니까 마음이 편안해 지면서 잠이 왔던 종업원의 목소리도.
나는 이 형용할 수 없는 현상의 실마리를 잡아보고자 조금 더 과학적으로 분석해 봤다. 주모님이 테이블 사이를 거닐며 주문받고 서빙을 하시는데 어째 그것이 동작이 이상할 정도로 매끄러웠다. 공기의 저항과 지면의 마찰이 전혀 없어 보였다. 5,000fps의 초고속 카메라로 주모의 몸동작을 분석해 보니 동작 하나하나 일말의 낭비가 없었다. 치밀하게 계산된 듯 버리는 움직임 하나 없이 극도로 최적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모님이 주문을 받으시는데 이상하게 안방 장판 위에 누운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고 졸음이 왔다. 주모님의 목소리를 스펙트럼 분석기를 통해 주파수를 측정해 본 결과 자연의 진동수와 조화를 이뤄 인간에게 가장 편안하게 느껴지는 432Hz와 DNA 복구와 세포 재생을 촉진하는 528Hz가 빈번히 측정되었다. 그리고 이 정도로 맛난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마음이 따뜻하고 도덕적으로 우월해야만 가능하다고 우리는 입을 모았다. 주모님의 도덕성 판단을 위해 도덕성 판단력 검사 DIT-2 로 주모의 도덕성을 평가해 본 결과 이론적 최고점인 95점에 육박했다. 또한 가스 크로마토그래피-질량 분석기로 낭만부대찌개의 냄새를 분석한 결과 신경계를 안정시키고 뇌를 활성화하는 1,8-시네올이 대량 관측되었다.
사실 이주승이 낭만부대찌개의 위대함을 말하지 않고, ‘거기 괜찮더라’ 정도로 언질을 줬으면 더 맛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아마 아무런 기대 없이 무방비 상태로 낭만부대찌개를 먹었으면 너무나 큰 충격에 혼수상태에 빠졌고, 42%의 확률로 사망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주승은 그 상황을 미리 예견했고, 기대치를 최대한 높여 맛을 떨어뜨려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즐길 수 있게끔 조치한 것이다.
낭만부대찌개를 먹는 이 순간만큼은,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독립적인 공간이다. 표면적으로는 여러 사람이 복닥거리는, 대단히 사회적인 공간이지만, 낭만부대찌개를 입에 넣는 순간, 이 세상 모든 사람 사물 사건이 소거되고 나와 낭만부대찌개, 오롯이 둘만 존재하게 된다. 애플의 에어팟 노이즈캔슬링 광고가 이 상황을 그나마 근접하게 묘사했다. 낭만부대찌개는 음식이라기 보다는 ‘다른 차원으로의 포털’에 가깝다.
낭만부대찌개 소시지를 한입 베어 물 때마다 오색찬란한 육즙이 슬로우모션으로 입안에 흩뿌려지고, 곧이어 도착한 밥알들이 도란도란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지금 여기는 지금 홍콩의 네온사인 거리 침사추이 같기도, 드론 1만 대가 밤하늘을 수놓은 선전완 공원 같기도, 튤립 축제가 한창인 네덜란드 큐켄호프 같기도 하다.
낭만부대찌개는 아주 작정한 모양이다. 밥도 무제한이란다. “이해한단다. 그럴 줄 알고 준비했어, 너는 누릴 자격이 있어. 마음껏 즐기렴. 토닥토닥.”이라고 내 귓속에 속삭인다.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우리는 더 이상 밥알 한 톨이라고 하지 않는다. ‘은혜 한 톨’이라고 한다.
낭만부대찌개 한입, 소주 한잔. 입속에서 소주가 부찌에게 말을 걸었고, 기분이 좋은지 어깨동무하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소주가 말할 줄 아는지 몰랐다. 이제껏 말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저 마음이 잘 통하는, 말할 가치가 있는 친구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었다. 1000년이 넘도록 한반도에서 말을 아껴온 소주는, 여지껏 풀지 못한 회포를 댓바람에 쏟아냈다. 얼마나 신명 나게 떠들어대던지, 그날 밤 잘 시간이 되었는데도 내 뱃속에서 계속 떠들길래 주의를 줬다.
낭만부대찌개에서 지각할 수 있는 요소 하나하나가 완벽 그 자체였다. 인간의 범주를 비약 넘어섰다. 이곳에서 관측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종합해 봤을 때,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의 무조건적인 은혜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12년동안 맹목적으로 부정했던 부찌신의 존재를 온몸으로 느끼고 나니, 나는 그저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낭만부대찌개는 음식이자 음료이고, 친구이자 연인이고, 타인이자 자신이고, 스승이자 조상이고, 땅이자 하늘이고, 빛이자 어둠이고, 현상이자 개념이고, 과거이자 미래고, 무이자 유이고, 결국 우주 그 자체로 귀결된다.
낭만부대찌개로 인해 전 세계 대화합, 종교 대 통합이 더 이상 한낱 꿈속의 허상 아니게 되어버렸다. 세계 이곳저곳에서 전쟁으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요즘, 낭만부대찌개가 지니는 의미는 가일층 짙어진다.
- 혹이 달린 영감은 놀부가 아니라 혹부리 영감이다. 하지만 본 글에서는 드립의 편의를 위해 놀부에게 혹이 달린 것으로 상정한다. ↩︎
- 이 셋은 정기적으로 부대찌개 담론을 벌여 최신 부대찌개 뉴스를 공유하고, 동향을 파악, 궁극적으로 부대찌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논의한다. ↩︎
- 람보르기니는 산천리자전거에서 나온 주황색 미니벨로인데, 타이어, 안장, 바테잎을 주황색으로 교체하고, 람보르기니 로고와 글자를 인쇄해 프레임에 붙여 람보르기니로 명명했다. ↩︎
- 풍만이는 접이식 미니벨로로 별다른 특징이 없는 아이였다. 접이식인데 접어본 적은 한 번도 없고 등하교용으로만 사용했다. 여느 날과 같이 자전거를 타고 등교를 하는데 엄청 푹신해 보이는 실리콘 안장이 장착된 자전거를 발견했다. 보통 안장이 아니었다. 안장 쿠션 높이가 15cm에 육박했다. 가만히 앉아 그 안장을 응시하고 있으니 8월의 천도복숭아 같기도, 빌렌도르프 비너스상 같기도 했다. 마음이 넉넉해지는 풍만함이었다. 나는 주변 자전거 가게와 인터넷을 뒤졌으나 그 풍만함에 견줄 안장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풍만이는 몇 달간 같은 자리에 놓여 방치되고 있었다. 주인을 잃은 풍만이는 내가 지나갈 때마다 나를 응시했고, 나는 그 애처로운 눈빛에 못 이겨 내 안장과 바꿔치기했다. 그렇게 풍만이는 내 품에 들어왔다. ↩︎
- 주변에서 흔히 유형의 중저가 산악용 자전거로, Mountain Bike의 약어 MTB에 ‘철[鐵]’을 붙여 철티비로 부른다. 주로 철색을 띠어 철티비로 일컬어지고,당근에서 5만 원 내외로 구매 가능하다. 실제 산악용으로 활용되기에는 내구도와 성능이 현저히 떨어져 유사 MTB로 불리기도 한다. ↩︎
- 혹이 달린 영감은 놀부가 아니라 혹부리 영감이다. 하지만 본 글에서는 드립의 편의를 위해 놀부에게 혹이 달린 것으로 상정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