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저 표정은 진짜 국가 보물이 맞다. 표정의 귀재로 서양에 모나리자가 있다면, 동양에 금동 반가 사유상이 있다. 인도인들도 금동반가사유상의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야릇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싯다르타가 한국인이었을 지도?’라고 생각할 거다. 아니 그게 맞다. 분명 한반도로부터 ‘아기 바꿔치기’ 된 것이다. 이보다 부처의 심오하고 웅숭깊은 사색을 표현한 불상이 전무후무하다는 건, 그 경지를 가장 깊게 이해한 민족이 우리네 민족이라는 방증이다.




강서고분 모 줄임 천장

중국 남북조의 영향을 받아 도교 색채가 얼큰한 고구려 왕릉. 도교의 사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이 사방을 감싸고 천장에 황룡으로 화룡점정! 그중에서도 천장을 네모로 돌려가며, 올린 ‘모줄임천장’이 강서고분의 백미다. Rossa 퍼빌리언을 디자인할 때 나무젓가락을 열심히 가지고 놀다 발견한 모줄임천장,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좋았다. 강서고분의 모줄임천장이, 회오리바람을 휘감으며 천공을 가르는 황룡을 나타낸것인 지는 모르겠지만, 네모의 쌓임을 표현의 도구로 사용하는 마음이 나와 통했다. 나와 천오백 년 전 고구려 사이에 가느다란 실 하나가 생긴 느낌이다.




가야 토기

가야 토기 삼국시대에 가야는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지 못 하고 금관가야, 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등의 소국가가 연합된 형태로 존재했다. 각 가야마다 토기의 성격이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으로 기하학 구멍(투창)이 난, 굽이 높은 그릇(굽다리 접시)과 그릇 받침(발형기대, 통형기대)이 두드러진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반동그라미, 불꽃모양 등 다양한 기하학 늘었다 줄었다 커졌다 작아졌다 춤을 춘다. 나도 춤춘다. 신명나게 기하학을 가지고 노는 가야 도공의 모습이 눈에 삼삼 귀에 쟁쟁하다. 세 번째 사진을 보자. 토기를 만들고 있는 가야인의 모습이 보인다.

가야인: “세모세모세모~ 다음은 뭘까요~ 세모? 두구두구두구.. 에잇 동그라미! 엌ㅋㅋㅋㅋㅋㅋㅋ”

김정현: “으아아악 동그라미라니!!! 졌다 흑흑흑”

가야인: (뒹굴뒹굴 포복절도한다)

루이스 칸과 마리오 보타도 가야 토기를 본떠 건축한 것이 틀림없다.

칸: “oh man~ gaya pots so good~ might just copy it~ license free gae ee deuk~”

보타: “gaya pot bellissimo~~ 🤌🤌”

나도 가야 토기를 보다가 시상이 터져 나왔다.


돌고 돌고 돌고 돌고 (전인권 톤)

기하학은 영원해

도형들을 기억해

천년 전 아지매도 세모 좋아

처녀 와 앉을때도 세모 좋아

천년 후 아재비도 세모 좋아

돌고또돌아 또또

피타고라스 뽀뽀

유클리도도 쪽쪽

황남대총

신라 5세기 경 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네덜란드 Flevolands Land Arts Foundation이 울고 갈 예술성이다. 왕릉을 대지예술로 치부하기에는 무례한 감이 없지 않지만, 황남대총 뒤쪽을 걷다 보면 ‘이 세상은 나와 하늘과 잔디 뿐’인 순간이 오는데 그때의 감동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단어가 없다. 그냥 이대로 죽어버려도 나쁘지 않을 것만 같다. 초현실주의 그림 화폭에 덜컥 떨어진 기분.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

현존하는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벽돌이 아니라 돌을 쌓아 만든 석탑이다. 나무 무늬의 장판, 천 무늬의 벽지, 대리석 무늬의 플라스틱 등 보통은 저급 재료로 고급 재료를 흉내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대로 흉내냈다. 중국의 전탑(벽돌로 만든 탑)을 흉내내기 위해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쌓았다. 모기 잡으려고 칼 빼는 느낌이랄까. 남의 떡이 커 보인, 사대주의에서 비롯한 얄팍한 술수가 인간적이어서 좋고, 돌을 하나하나 깎은 뚝심이 경이로워서 좋다.



구례 화엄사 구층암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되고, 임진왜란 이후 타버린 암자를 재건할 때, 마당 앞 죽은 모과나무를 잘라 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자연목을 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양에서 껍질만 벗겨 사용하는 것을 ‘도랑주’라고 한단다. 도랑주.. 도랑주.. 메모…) 재밌는 건 죽은 모과나무가 뿌리를 내려 주춧돌을 덮었다. 나무는 전구 꺼지듯 죽지 않고 서서히 죽나 보다. 무과나무 기둥을 보고 있으면 나무 기둥이 복도에서 벌서듯 지붕을 떠받드는 게 아니라 자연이 은혜를 베풀어 집을 보듬는 듯하다.

자연: “이 한 몸 내어, 너를 거두겠다. (엄근진)”

구층암: “워메, 성은이 망극해부러~”



원성왕릉 무인석

원성왕릉 봉분 앞으로 각각 한 쌍의 석조 사자상, 무인상, 문인상이 무덤을 지키고 있다. 그중 무인상이 눈에 띄는데,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여기 서역인 특유의 우락부락함과 뭉글뭉글함이 한국의 해태상과 완벽한 조형적 조화를 이룬다. 외로웠던 해태가 드디어 같은 디자인 언어의 사람 석상을 만났다. 물론 신라 인들이 통일된 디자인 언어 확립을 위해 상상 속의 장군을 만들었을 리는 만무하고, 학계에서는 통일 신라가 페르시아와의 교역이 있었고, 그 페르시아 상인의 모습을 조각한 것으로 추정한다. 페르시아 상인이 막걸리에 빠져 조선에 정착했을 수는 있어도, 관직에 올라 무인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은 작아 보이는데, 어쩌다가 왕릉을 지키는 무인석이 됐을까? 아무래도 원성왕이 페르시아 상인을 보고 쫄은 모양이다. 그의 떡대와 험상궂은 눈매를 보며 한주먹할 것 같다는 생각에 무덤을 지키는 무인석으로 조각해 넣지 않았을까 싶다. 네덜란드에서 살 때 클럽을 보면 이란계로 보이는 수염 수북한 바운서들이 종종 보이는데, 확실히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흠씬 든다.(gotya WonSeong bro~)



발해 이불병좌상

현대적인 감각에 거나하게 취해본다. 누끼 따서 살짝 겹치게 복붙한 느낌이랄까? 그리고 불좌상 하나의 머리가 떨어져 나가서 더 좋다. 이야기와 수수께끼가 생겼다. 아마 머리가 붙어있었으면 권위 있기로 정평이 난 ‘김정현의 내 취향 문화재 모음’에 등재되는 영광을 누리지 못 했을 것이다. 사근사근한 미소의 듀얼코어좌불, 둥실둥실 떠 있는 5연꽃동자, 스근하게 사이드에서 침투하는 2협시. 뮤지컬 하나 뚝딱이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감히 부처님 얼굴을 평가하다니 언감생심이지만, 참 귀엽게 생겼다(참고로 착한 여자가 못생긴 남자를 귀엽게 생겼다고 한다). 여기서 멈췄다면 그냥저냥 개성 있는 미륵보살이겠다. 하지만 관촉사 미륵보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빵 크기로 한다. 라이노에서 3D모델을 불러오기 했는데 단위가 다르게 설정되어 혼자 100배 커진 느낌이랄까. 진짜 무턱대고 크고 대책 없이 크다. 그래서 좋다. 또 ’커서 좋다‘라는 원인 결과가 명료한 사고의 심플한 사람으로 만들어줘서 좋다. 집에 마당이 있다면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올멕 두상을 두고 커피 한 잔에 센치해지고 싶다.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지구샌드위치의 시조 격 작품이다. 암벽에 머리 하나 띡 올려놓고 부처님이라 명명하는 사나이의 배짱이 돋보인다.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낙향한 호족들이 고려 말기에 지방에서 독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고, 이들은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는 압도적인 크기와 형상의 불상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 자신들의 취향을 잔뜩 집어 넣어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을 비롯한 독특한 불상들이 많이 탄생했다.



족두리.

원 간섭기에 몽골의 외출용 모자가 고려로 유입되고 로컬라이징됐다. 왕실에서만 쓰다가 민가에 퍼졌고, 특히 머리숱이 없는 노파가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점점 예복 관으로 자리잡았다고. 아낙네 각자의 입맛대로 패물을 달아 개성을 드러낸다. 오늘날의 크록스다. 나는 특히 작고 봉긋한 족두리가 좋다. 저 김말이 하나 머리에 대뜸 얹는다고 사람 인격이 달라질 수는 없는 것을 알면서도, 머리에 족두리 얹은 아낙네를 보면 ’저 분은 참 참하셔‘라고, 확신하게 된다. 만약 소개팅녀가 소개팅 자리에 족두리를 쓰고 나오면, 나는 새초롬할 자신이 없다.



신사임당. 초충도(풀과 벌레를 그린 그림)

소싯적 쌍쌍바를 ㄱ자로 나눠 나는 큰 거, 친구는 작은 것을 주고 낼름낼름 빨아대고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신사임당 벌레 개잘그림.” 친구의 얼굴에는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이윽고 친구는 벌떡 일어나 쌍수를 들고 “맙소사! 신사임당 벌레 만세!”를 외쳤다. 사실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근엄하고 고상한 현모양처인 줄로만 알았던 신사임당의 아기자기하고 여리여리한 초충도를 보고 놀랐던 일은 분명 있었다.


겸재 정선. 장안연우

진경산수화의 창시자, 겸재 정선이 북악산 서쪽 기슭에 올라가 그린 안개 낀 한양의 전경이다. 나는 안개가 좋다. 사면으로 안개가 자욱해, 방향 거리 시간을 몽땅 잃어버리고 싶다. 그래서 이 그림이 좋은지는 모르겠다.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나무들, 닭살처럼 돋아난 한옥들, 7시 왕여드름처럼 내려앉은 사당. 한양은 좋은 곳이었지 싶다.

정선은 분명 한양을 굽어보며 “오우 베이비 우리네 산천”을 외쳤을 것이다. 혹자는 당시는 외래어가 조선에 유입되기 전이라 ‘오우 베이비’를 외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혹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가 남산을 향해 “오우 베이비 댐 댐 우리네 산천”을 외쳤다는 것을.



인재 강희안. 물을 바라보는 선비

푸짐하고, 순박하고, 여유롭고, 천연덕스럽고, 고상하고, 인자하고, 자상하고, 담담하고, 너그럽고, 온화한‘ 등의 형용사를 AI 프롬프트에 넣는다고 저런 선비의 모습을 그릴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 어떤 숭고한 경지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저리도 간결하게, 이 모든 형용사들을 품은 선비의 모습을 그릴 수 없다.



백자 달항아리

🫄🏻




백자 용무늬 항아리

백자가 “으갸갸갸갸” 한다. 사나운 눈맵시와 흐물거리는 몸뚱어리, 비늘로써 마구 찍힌 ㅗ, 날카로운 발톱은 더할 나위 없는 용의 자태다. 나는 도공이 이 항아리를 만들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궁금하다. 본인도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 하고 껄껄대며 만들었을지, 혹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만전을 기해 상상 속의 용 모습을 그려냈는지. 후자였으면 좋겠다.



장군병

눈 뒤집혀서 볼따구에 해바라기씨 마구마구 집어넣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 새침한 햄스터. 사실상 탐욕의 햄찌. 맞잖아.



수원 화성.

조선 최고의 콤비, 정조와 정약용 정&정 콤비의 수작 수원화성. 거중기의 제작 배경이기도 하다. 수원 화성의 성문을 U자 형태로 감싸는 옹성이 있는데, 적이 성문을 진입할 때 적군의 측면, 후면을 공략할 수 있도록 했다. 화살을 쏘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고 한다. 적군을 향해 뜨거운 물을 붓는 나를 상상해 본다. 초딩 시절 학교 3층 화장실에서 창문 밖으로 물풍선을 투하해 지나가는 동료 초딩을 놀래켜 본 적이 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한다.


추사 김정희. 추사체

세련한 필체로 이름을 떨쳤던 조선의 소문난 명필, 추사. 추사가 말년에 유배되어 개발한 필체, 추사체. 거침없고 호방하고 자유로운 선이 기깔난다. 항간에는 백두산 호랑이가 대필했다는 설이 나돈다. 이만큼 호방한 필치는 사람보다는 백두산 호랑이의 것에 더 가깝다는 주장인데, 충분히 일리가 있다. 사실 필자도 추사체의 굵직하고 대담한 선에서 자극받아, 0.3mm 샤프에 HD 샤프심에서 2.0mm 샤프에 무려 2B 샤프심으로 둔탁하게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피카소, 칸딘스키도 초기에는 정갈하고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다가 말년에는 거칠고 투박한 추상 미술로 갔다. 어떤 한 경지에 이르면 결국 이렇게 되는 걸까? 배린이 시절에는 중무장한 아바타였다가 고인물이 되고 알몸에 토끼 머리띠 하나 하고는 양학하는 심리와 얼추 유사하지 싶다.



사실 요사이 성 정체성 풍조에 입각해 본다면 XY 염색체를 가졌다고 남자라고, XX라고 여자라고 굳세어라 정의할 필요가 없겠다. 같은 원칙을 적용해, 내가 한국인의 피를 가졌다고 나를 한국인이라고, 유전학적으로는 한민족이겠지만 내 국가 정체성을 한국인으로 규정할 철칙은 없는 것이 아니겠냐는 생각을 살포시 해본다. 하지만 이리도 잘생긴 문화재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 한 켠이 흔연해지는 것을 주체할 방도는 없어 보인다.



사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