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면 나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좌표계 상의 경도, 위도 값, 혹은 주민등록초본 상의 주소 등의 딱딱한 위치가 아니라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이라는 흐름 속 나는 어디 있는지, 어떤 물결 속에 있는지, 또 어떤 관성에 의해 어떤 속도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나를 F/1.8 망원렌즈가 아닌 F/22 광각렌즈로 볼 기회를 준다.
하멜 표류기, 안네의 일기, 백범일지를 읽어보니 이 사람들도 결국에는 나와 같은 ‘사람’이고 몇백, 몇천 년이라는 뭉텅구리 숫자 속에 얼핏 존재하는 형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같은, 삶이 있는 ‘살아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숫자는 같지만, 그 숫자의 깊이는 더 이상 같지 않다.